모든 땅의 개척자들

복음을 고국 캄보디아로 가져오다

비치트 이드가 새로운 신앙을 품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야기

제임스 골드버그

과거의 유령

비치트 이드가 십 대였을 때, 그를 둘러싼 세상은 무너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때때로 미공군이 거의 3백만 톤의 폭약을 그의 나라 캄보디아에 떨어뜨릴 때, 그는 멀리서 B-52 폭격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웃 나라 베트남의 전쟁이 그곳까지 번진 것이었다.1 같은 시기에, 쿠테타로 왕정은 막을 내리고 크메르 루즈라고 불리는 비밀 공산주의 민병대가 지지를 얻으며 수도를 향한 피비린내 나는 행군을 시작했다. 이 시기 캄보디아인들의 삶은 몰몬경에 나오는 가장 폭력적인 기간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학자들은 비교적 평화로웠던 이 사회를 그렇게 빨리 와해시킨 요인이 무엇인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비치트는 후에 그의 경험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전혀 영문을 몰랐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만 보았을 뿐입니다."2

비치트의 부친인 파오 이드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산림 공학 전문가인 파오는 교육과 공공 서비스를 중시했다. 그는 또한 자녀들이 프놈펜 같은 교전 지대에서는 배움의 기회를 갖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1974년 그는 비치트를 필리핀으로 보내 공부시켰고 비치트의 어머니와 나머지 세 남매를 프랑스로 보냈다. 파오 자신은 남아서 전쟁이 끝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사용할 새로운 기회가 오기를 바라며 기다렸다. 하지만, 승리한 크메르 루즈는 국민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캄보디아인 네 명 중 한 명꼴로 그들의 법에 따라 죽어야 했으며, 파오 이드도 그 비극을 피해 갈 수 없었다.

1975년 4월 프놈펜이 크메르 루즈에게 함락된 후, 유엔 최고 난민 위원회는 비치트에게 편도 비행기 표를 보내 프랑스에 살아남은 가족들에게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몇 안 되는 소지품과 "많은 과거의 유령"을 안고 돌아왔다. 파리에서, 그는 난민으로 새 삶을 시작하여 어머니와 형제 자매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의무를 짊어졌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밥그릇 증후군

프랑스에서 비치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면서 없는 시간을 쪼개 통신 강좌를 들으며 대학 입학을 준비했다.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1977년, 그는 소르본 대학 사회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일들을 경험한 후, 사회과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그는 회상했다. 그의 성적이 반에서 상위 10% 이내였지만, 공부를 통해 답을 찾겠다는 희망은 곧 사회학 학위로 가족을 부양할 돈을 어떻게 벌지에 대한 걱정으로 바뀌었다. "밥그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그의 처지 때문에, 비치트는 국제 경영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불교 신자였던 그는 나중에 은퇴하면 과거와의 영적 화해와 화평을 찾을 시간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저는 은퇴하여 어딘가로 가 은둔 생활을 하며 명상하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멀리 떠나고 싶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전쟁의 그 모든 잔혹한 행위들을 본 저로서는, [......] 정말 그게 소원이었습니다."

불교 신자였던 그는 나중에 은퇴하면 과거와의 영적 화해와 화평을 찾을 시간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일에 전념했다. 판매 분야에서 경험을 쌓기 위해, 그는 프랑스 농촌 중심지에서 여성 "스타킹, 양말 등"을 파는 일을 잡았다. 그곳 사람들 대부분이 캄보디아 사람은 처음 만나 보는 것이어서 그는 때때로 자신이 "이티"처럼 느껴졌으나, 그 경험 덕분에 국제 상품 무역 회사에서의 다음 직장을 얻게 되었다. 하급 직원에서 중동 및 극동 지역 책임자로 빨리 승진하면서,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수단, 태국, 싱카포르를 왕래하게 되었고 전 세계가 그의 앞에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외로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의 삶에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맞선을 통해 티나 쿠라는 여성을 만났고,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느나 직장 일이 바빠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티나를 만난 지 일 년 후에, 비치트는 "출장을 너무 많이 다니다 보니 지치기" 시작했고 "직장을 그만두고 싱가포르로 돌아가 여자 친구에게 집중해야겠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비치트가 결혼을 언급했을 때, "티나는 교회 성전 밖에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처음에, 비치트는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싱가포르에는 성전이 도처에" 있었다.3 그러나 그녀와 결혼 성약을 맺기 위해서는 그녀의 후기 성도 신앙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 곧 명백해졌다. 이전 회사에서 스트레스와 출장이 덜한 이집트의 직책을 제안했을 때, 비치트는 티나를 아내로 카이로에 데려갈 수 있도록 그녀의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비치트는 그 신앙에 대해서 잘 몰랐다. "제가 교회에 대해 들은 것이라고는 일부다처제가 전부였어요"라고 그는 회상했다. 캄보디아에서 그런 관행이 점차 사라지기 훨씬 전에 교회에서는 이미 그 제도가 끝난 터였다. 그가 선교사들과의 필수 토론들을 속성으로 진행하면서, 도움이라고는 그 지역의 한 프랑스 회원과 나눈 한두 차례의 대화와 아내 될 사람이 가진 신앙이라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부인 상태로 많은 가르침을 소화해야 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에 담긴 영적인 어떤 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배우면서 그는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인생의 의미와 은퇴 후에 영적 생활를 하고 싶어 했던 그의 오래된 바람을 생각하기 시작햇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말로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영적 생활을 하기 위해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회복된 복음을 통해, 그는 지금 헌납된 삶을 살 수 있다. "지금 많은 훌륭한 것들을 할 수 있으므로 산에서 혼자 명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미국인이었다

비치트 이드는 싱가포르에서 1987년 결혼식 전날 침례받았다. 다음 주에, 그는 카이로에 있는 교회에 참석했다. 자신의 나라에 무력 간섭의 고통스런 기억을 가진 캄보디아인인 그는 이집트에 있는 많은 교회 회원들이 이집트 군대를 지원하도록 파견된 미군들이며, 그 중에 상당수가 베트남 참전 용사라는 것을 알고는 크게 놀랐다. 지부 회장인 돈 포쉬는 "헨리 키신저처럼 생겼고,4 그것이 제게 또 다른 스트레스였습니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람들과 비치트가 어떻게 예배를 볼 수 있었는가?

"힘든 시작이었어요." 라고 그는 말했다. 침례 받기 전에 그가 느꼈던 영적 느낌들은 당면한 문화적 차이를 헤쳐나가기에 충분한 힘이 못 되었다. 일요일마다 그는 티나를 교회로 데려다 주었으나 티나가 모임에 참석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렸다. 복음 안에서 인생을 함께하고 싶은 그녀의 소망은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

Vichit and Tina Ith, 2014

그러나 티나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금식 간증 모임에서, 티나는 일어나서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그녀의 배우자에게 손을 내밀어 달라고 지부 회원들에게 사정했다. "저는 여러분이 제 남편에게 친구가 되어 주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에게 이야기하고 그가 교회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그녀는 말했다. 회원들은 그 말을 들었고, 비치트는 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말로 최선을 다했어요."라고 비치트는 말했다. 그래서 그는 식사 초대와 활동 초대에 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회원들과의 영적 관계의 성장은 그들에 대한 첫인상을 불식시키게 되었다. "이집트는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그곳의 모든 훌륭한 회원들 덕분이죠." 비치는 말했다. "그들은 제가 복음에 대한 간증을 얻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비치트는 복음이 관념적인 차이와 실제적인 차이 모두에 대해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것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캄보디아로 돌아감

카이로의 교회 회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비치트는 브리검 영 대학 MBA 프로로그램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입학 허가를 받았다.5 비치트가 학위를 끝내는 동안 티나는 프로보에서 첫 딸을 낳았고, 이드 가족은 비치트의 다음 직장으로 태국에서 살게 되었다.

이드 가족이 태국에서 사는 동안, 캄보디아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1991년, 오랜 세월에 걸쳐 파괴된 곳을 재건하고 평화를 증진하도록 유엔 사절단의 입국을 허가했다. 크메르 루즈 민병대가 여전히 농촌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1993년에 국가의 첫 번째 자유 선거가 발표되었다.

사람들은 비치트와 연락하기 시작했다. 비치트의 부친을 고용했던 왕의 아들인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선거 후보로 나서고 있었고 비치트에게 그의 당과 정부에 합류해 달라고 권유했다. 태국의 선교부 회장 래리 화이트는 캄보디아에 교회를 전파할 기회가 왔다고 느끼고 이드 형제에게 기꺼이 도와줄 의향이 있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영감을 받았다.

"캄보디아에 교회를 전파할 기회가 왔습니다."

처음에, 비치트는 두 사람 모두의 제안을 거절했다. 라나리드 왕자에게는 "저는 정치가가 아닙니다"라고 간단히 답했다. 화이트 회장에게는 좀더 직접적으로 말했다. "제게 캄보디아로 돌아가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그곳에서 겪은 일로 인해 저는 정신적 외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비치트는 "과거에서 계속 도망칠 수만은 없어"라는 느낌을 계속해서 받았다. 그의 나라와 그의 교회가 돌아오라고 그를 계속해서 부를 때, 그는 다시 생각했다. 화이트 회장과 계속 이야기했고 "결국 어느 날 그와 함께 캄보디아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고국을 축복함

1993년 4월 29일, 일단의 후기 성도들이(존과 셜리 카맥, 래리와 재니스 화이트, 그리고 비치트 이드) 아직 보수되지 않은 프놈펜 공항의 울퉁불퉁한 활주로에 착륙했다. 당시 캄보디아 외무성에 근무하고 있던 비치트 어머니의 사촌이 공항에 마중 나왔고 정부 관료들과의 첫 번째 모임에 동석했다.

고무적인 첫 모임이 끝난 후 카맥 부부와 화이트 부부는 비치트를 따라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던 집을 방문했다. 많이 바뀌었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집은 캄보디아 장군이 차지하고 있었고 AK-47 자동 소총이 어린 시절 비치트의 방 한편에 놓여 있었습니다."라고 화이트 회장은 회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격동의 잔재들 가운데 비치트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가 어렸을 때 집 주변에 있던 키 작은 망고 나무들이 "지금은 커져서 녹색 열매들이 무성하게 달려 있었다"는 것이었다.6

"집 주변에 있던 키 작은 망고 나무들이 지금은 커져서 녹색 열매들이 무성하게 달려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평화와 전쟁의 시기를 겪은 그 집에 다시 돌아온 것은 그 강한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그가 떠날 때는 아버지를 두 번 다시 못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마지막 감사의 말도 마지막 인사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날 밤, 비치트는 화이트 회장에게 "그는 항상 아버지에게 자랑스런 아들이 되기를 원했으며 아마도 교회가 캄보디아에 들어올 수 있게 돕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이 소망을 가장 잘 이루는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말을 하면서 울었습니다."라고 화이트 회장은 회상했다. 그러고 나서, 다섯 명의 후기 성도들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아시아 지역을 감리하는 카맥 장로가 "그 땅에 신권 축복을 주었다." 그는 "협상과 화해의 영이 임하여" 국민들 가운데 평화가 넘치며 비치트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했다.7

나라에 대한 큰 희망

1993년 5월, 캄보디아 선거가 이루어졌고 새 정부가 평화적으로 들어섰다. 1993년 4월 방문을 통해 조국에서 직접 봉사할 시간이 왔다는 확신을 얻은 비치트는 새 수상의 경제 고문으로 캄보디아로 돌아갔고 곧 캄보디아 투자 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동시에 , 그는 종교 담당 국무부와 직접 접촉하여 캄보디아에서 교회가 활동할 수 있는 공식적인 허가를 얻어 냈으며 선교사들과 기타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입국 비자를 확보했다. 이 일은 1994년 5월 캄보디아에서 교회에 처음 가입한 사람인 팔 마오의 침례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일이었다.8

"비치트는 새로운 회원들의 간증이 얼마나 강한지 거의 충격적이었다고 보고했습니다."

다음 몇 해 동안 교회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비치트는 "새로운 회원들의 간증이 얼마나 강한지 거의 충격적이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화평과 사랑에 굶주렸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들의 생활은 그 원리들을 그들의 가정과 사회에 심겠다는 신념을 보여주었다. 비치트는 특히 캄보디아에 사는 베트남 사람들이 그들의 캄보디아 형제 자매들과 두 민족 간에 역사적 갈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안에서 연합"하는 것을 보면서 "영적으로 만족스러웠다."

LDS Meetinghouse in Phnom Penh

때때로 국가를 위한 정부 일이 더디고 힘들 때조차도, 비치트는 회원들의 신앙을 보고 "나라에 대한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를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남편과 아버지"로 만들어 준 그 복음이 그의 고국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단순하고 검소한 생활, 근면, 사회 봉사와 같은 교회의 믿음은 캄보디아에 모두 중요합니다."라고 그는 1995년 페놈펜 포스트에서 말했다.

비치트는 또한 캄보디아 지부들이 복음 전파을 위해 선교사들을 해외로 배출하기 시작했을 때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제 캄보디아인 사무 보조들 중 한 명이 캘리포니아에 파견된 첫 번째 선교사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이 매우 기쁩니다."라고 비치트는 말했다. 그들의 독특한 유산과 경험은 복음이 필요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곧, 비치트의 두 딸이 봉사하게 된다: 한 명은 대만 대청 선교부에서 다른 한 명은 영국 리즈 선교부에서 봉사할 것이다.9

고난 속의 캄보디아를 떠난 지 40년이 지난 오늘, 비치트는 교회 젊은 새대들을 보며 "의로움에 기초할 국가에 대한 위대한 약속"을 본다.10 지난 20년 동안 캄보디아가 이룬 모든 경제 발전을 보았을 때, 선한 삶을 살며 서로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국민 개개인들이 언제나 국가의 가장 큰 자원이 될 것이다.

각주

[1] 비교하자면, 연합군은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약 2백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Taylor Owen and Ben Kiernan, “Bombs Over Cambodia,” The Walrus, 2006년 10월호, 63쪽 참조. 2014년 5월 23일 접속, http://www.yale.edu/cgp/Walrus_CambodiaBombing_OCT06.pdf.

[2] 비치트 구술 역사, 2001년 브라이언 리브스가 인터뷰. 교회 역사 도서관. 기타 주석이 없는 경우 이 출처의 기타 모든 인용문. 2014년 5월 18일에 비치트가 저자에게 보낸 이메일을 기반으로 일부 약간의 어휘를 변경함.

[3] Carla B. Call, “Opening of Cambodia.” 타자 원고. 교회 역사 도서관.

[4] 키신저는 캄보디아 폭탄 투여 기간 중에 미국 리처드 닉슨 정부에서 국가 안보 보좌관과 미 국무 장관을 지냈다.

[5] 그는 후에 하버드 대학원에서 거시 경제학과 재무를 전공했다.

[6] Larry White, “The Opening of Cambodia.” 타자 원고. 교회 역사 도서관.

[7] Larry White, “The Opening of Cambodia.” 타자 원고. 교회 역사 도서관.

[8] 팔(Phal)은 수많은 캄보디아인들이 난민으로서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동안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일부 출처는 그녀의 이름을 "Pahl"로 잘못 쓰고 있다. 이 기사의 초기 버전에 있는 철자는 팔의 남편 웨인 라이트의 조언으로 2014년 6월 9일에 수정되었다.

[9] 비치트 이드, 저자에게 보낸 이메일 메시지, 2014년 5월 18일.

[10] 비치트 이드, 켄 홀렌저와의 출판되지 않은 화상 면담, 2014년 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