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이것이 우리의 성약이 되리니’


“이것이 우리의 성약이 되리니”

교리와 성약 13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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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쿼터스의 개척자들

1846년 2월, 브리검 영은 손수 선발한 3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얼어붙은 미시시피 강을 건넜다. 이들의 당초 계획은 여름에 로키 산맥의 대피처에 당도하여 뒤이어 오는 사람들을 먹일 곡식을 파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달 동안이나 계획은 진척되지 못했다. 폭우로 시냇물과 강이 정상 수위를 넘어 아이오와의 드넓은 평원은 진흙탕이 되어 버렸다. 같은 시기에, 천 명이 넘는 후기 성도들 중 대부분이 이주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도 선발대와 같이 움직이겠다고 고집했는데, 이는 불확실한 시기에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그들의 간절함에서 발로한 것이었다. 진척 상황이 지지부진하자 브리검 영은 시현으로 본 목적지에 올해 안에 당도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미주리 강기슭에 윈터쿼터스를 세웠다.

이 개척자 선발대 외에도, 나부에서 출발한 후기 성도는 수천 명에 달했고, 그중 대부분은 당초 계획보다 일찍 길을 떠난 상황이었다. 1846년 가을 무렵 윈터쿼터스에 들어온 인원은 7,000명이 넘어섰다. 그들은 동굴과 마차, 임시 오두막과 급조된 통나무 집에서 지내야 했다. 이주 경로 곳곳에서도 3,000명 정도가 비슷한 처지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들 대다수는 영양실조와 혹심한 날씨 탓에 질병에 시달렸다. 일부 사람들은 신앙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들 때문에 1846년부터 1847년 사이의 겨울은 브리검 영에게 인생 최대의 고비가 되었다. 그는 훗날 그때 “마치 자식이 많은 어마어마한 가족의 가장이” 된 기분이었으며, 거의 “25톤”1은 됨직한 책임감에 짓눌려 있었다고 회상했다.

1847년 1월 무렵, 그는 입던 옷이 헐렁해질 정도로 핼쑥해졌다. 브리검은 성도들을 걱정하고, 해야 할 일들을 권고하며, 하늘의 인도를 간구했다. 그리고 1847년 1월 14일에, 응답이 왔다. 이틀 뒤에 브리검 영은 “주의 말씀과 뜻”(교리와 성약 136편)을 받아들이도록 성도들에게 권고했다.2 “서부로 여행하고 있는 이스라엘 진영”(교리와 성약 136:1)이라는 표현으로 계시가 시작되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 계시가 개척자 부대 조직 방법만을 거론하는 것이라 여기기도 했다. 다시금 브리검 영과 교회로 주의를 집중시킨 이 계시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채 말이다. 성도들에게 여행 중의 행실이 목적지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을 주지시킨 이 계시는 어쩔 수 없이 감행해야 했던 이 애처로운 서부 이주 여행을 뜻깊은 공동의 영적 경험으로 만드는 큰 계기가 되었다.

말씀에 귀 기울이라

기도에 응답을 받은 브리검 영은 주님의 기대를 성도들에게 분명히 이해시키고자 즉시 행동을 취했다. 계시에 있는 많은 원리는 이미 조셉 스미스가 가르쳤던 것이었지만, 1846년 대이동 당시에는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년도의 여행에서는 권고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일부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실 가르침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더 많았던 터였다. 브리검은 계시로 밝혀진 원리들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3 호레이스 앨드리지는 이 계시를 접한 후 “이대로 실행한다면 [성도들 자신]의 구원을 입증하게 될 것”4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호세아 스타우트는 이 계시를 따르면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쳐도 필요한 평온과 단결을 얻게 되며 아이오와 횡단 여행을 어렵게 만들었던 “격렬한 논쟁을 잠재울”5 것이란 점을 포착해냈다. 사람들은 이 계시를 신뢰함으로써, 십이사도들과 같은 부대에 편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십이사도들 역시도 특정 그룹을 운영하기 위해 매일 해야 하던 일들에서 벗어나 교회 전체를 이끄는 지도력에 더 힘을 쓸 수 있었다.

조셉 스미스는 1834년에 시온 진영에서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그리고 세 사람으로 구성된 회장단의 조직 모형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브리검 영은 성도들이 나부를 떠나기 전에 이런 모형을 구현하려 시도했지만, 그렇게 우선시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1847년에는 성도들을 어떻게 조직하느냐 하는 문제는 극히 중요한 것이 되었으므로, 브리검 영은 계시를 글로 다 적기도 전에 “서둘러 편지를 보내 이주 부대를 조직하는 방법을 형제들에게 교육하자고”6 제안하기까지 했다.

대장들을 임명하는 일 이외에도, 브리검은 조직상의 다른 두 가지 변화가 진척되도록 감독했다. 첫째, 부대 규모는 짐마차 100대를 넘지 않도록 제한되어야 했다. 둘째, 일단 사람들이 한 부대에 배치되면, 여행이 끝날 때까지 소속 부대 변경을 금했다. 아이오와를 건너 대이동 행렬에 올랐던 성도들의 특징이 느슨한 조직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대단한 변화였다. 비록 모든 일이 생각대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1847년부터 시작한 몰몬 피난 행렬은 당시 비몰몬인들의 서부 이주 행렬의 일반적인 모습과 비교해볼 때, “미국 역사를 통틀어 아주 세심하게 조정되고, 의도적으로 계획되고, 또 상당히 조직화된 행렬이었다.”7

성도들을 주의 말씀에 따라 조직하는 일 이외에도, 브리검 영과 십이사도들은 주의 뜻에 따라 사는 방법을 성도들에게 보여 주는 일에 착수했다. 브리검은 1847년 선발대의 역할이 단순히 뒤따라올 사람들을 위해 길을 개척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성약의 길을 세우는 데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행에 합류하는 모든 사람은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키기로 성약하며 약속[해야]”(교리와 성약 136:2) 했다. 이에 더하여, 계시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성약이 되리니 곧—우리는 주의 모든 의식을 지켜 행하리라”(교리와 성약 136:4)

나부에서 피난을 떠나기까지, 교회 지도자들은 몇 달에 걸쳐서 가능한 많은 성도가 성전 의식에 참여하여 성스러운 성약을 맺을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성도들이 성약을 지키고 계명에 따라 생활하려고 애쓴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축복이 되고 도움이 되는, “높은 곳에서 오는 [약속된] 권능을”8 요구할 수 있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상기시키셨다. “나는 이스라엘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마지막 날에 나의 팔이 뻗어 있느니라.”(교리와 성약 136:22)9 이 성약의 여정에서 볼 수 있었던 또 다른 뚜렷한 특징에는 “분배 받은 재산에 따라 … 균등하게 분담”하여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점을 성도들에게 상기시키는 일도 있었다. 그 책임에는 또한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할 때 다음과 같은 주님의 약속이 수반되어 있었다. “너희는 복을 받으리니, 너희 양 떼와 너희 소 떼와 너희 밭과 너희 집과 너희 가족에 복을 받으리라.”(교리와 성약 136:8, 11)10 성약을 지키고, 계시에 제시된 현세적인 청지기 직분을 충실히 행할 때, 인내와 겸손, 감사함이라는 덕성은 후기 성도 개척자들이 광야에서 정착하고, 새로운 집과 지역 사회를 만들고, 세상을 채우는 운명을 지닌 교회의 토대를 놓을 때, 분명 도움이 되는 요소였다.11

성약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이해가 열리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들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게 여정을 소화해야 할 특권과 책임이 있었다. 성도들이 아이오를 횡단하는 동안 실질적인 준비와 식량이 부족했던 점이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브리검은 이 여정의 성공 여부는 인력과 지도, 짐마차와 공급물자에도 어느 정도 달려 있겠지만,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과 뜻이라고 믿었다. 성도들이 그분을 신뢰하기만 한다면, 주님은 필요하다면 하늘의 만나를 미국의 평원에 내려 주실 수도 있으셨다. 따라서 성도들은 두려움으로 짐마차에 산더미 같이 짐을 실을 필요가 없었다.12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브리검 영은 선발대 인원을 144명으로 줄이고, 한 사람당 45kg의 식량만을 가지고 광야로 떠나도록 지시했다.13 브리검은 “그 정도의 짐을 갖고 떠날 신앙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 윈터쿼터스에 남아도 된다고 말했다.14 그는 “산악지대로 가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간악함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나아가 “주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고, 정직하게 생활하며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을 돕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부대에 합류시키고 싶지 않다고”15 단언했다.

“주의 말씀과 뜻”을 받는 며칠 사이, 브리검은 “이 백성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세상에” 알리는 사교 행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19세기 미국에서는 춤이 부도덕한 오락 활동으로 간주되는 일이 적지 않았지만, 브리검은 선발대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형제들이 그만둘 때를 알고” 또 “이 여행의 목적을 [결코] 잊지 않고 또 너무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유쾌한 모임과 춤에서 야기되는 해악은 없습니다.”16 성도들에게 춤을 권유함으로써 브리검은 다음과 같은 계시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네가 즐거우면, 노래로, 음악으로, 춤으로, 그리고 찬양과 감사의 기도로 주를 찬양하라.”(교리와 성약 136:28)

준비를 하면서, 그는 그들이 상황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은 주님께서 돕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었다. 선발대원들이 파종 시기에 맞춰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고 우려하자, 브리검은 이렇게 단호히 말했다. “설령 우리가 도착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갈 수 있는 만큼 빨리 가면 됩니다.” 그는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면” “[그들이] 마치 곡식을 심은 아주 드넓은 땅을 소유하게 된 것처럼 만족하게 될 것이고, 나머지는 주님께서 해 주실 것”17이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여행보다 더 명확하게 제 마음속에 떠오른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저 사이에는 평안함이 마치 강처럼 흐릅니다.”18

배움의 시간

윈터쿼터스에서 솔트레이크밸리에 이르는 여정은 교회 지도자들과 회원들 모두에게 훈련의 시간이었다. 윌포드 우드럽은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했고, 조지 에이 스미스는 대원들이 “이 여정을 이제껏 그들이 거쳤던 가장 훌륭한 학교의 하나로 기억할” 것이라고 느꼈다.19 브리검 영과 성도들에게 이 여정은 권고에 순종하여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고, 또한 주님을 믿는 신앙을 행사할 기회였다. 계시가 주어진 이후 성도들 사이에 나타난 눈에 띄는 변화를 윌리엄 클레이튼은 이렇게 관찰했다. “마치 구름이 흩어지고, 새로운 영역으로, 새로운 분위기로, 새로운 사회로 우리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20

선발대의 1847년도 여행은 성도들이 다시 힘을 내 각오를 하고 임했음에도 시련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초 계획은 “풀이 자라기 한 달 전”에서 늦어도 3월 15일 전에 떠나는 것이었으나21 그해는 봄이 늦게 찾아왔고, 일찍 자라는 풀들도 그 돋아나는 시기가 평소보다 몇 주나 늦어졌다. 때 아닌 추운 날씨로 부대는 4월 중순까지도 집결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22 살을 에는 추운 밤 날씨와 강풍이 불어대는 초원지대, 강을 건너야 하는 어려움, 가축의 분실, 길고 단조로운 여정으로 가득한 나날 등을 겪으면서, 여행 초기의 설렘은 곧 시들해졌다.

계시에 있는 원리에 대해 열정적인 각오가 있었던 브리검 영은 때때로 일부 부대원들의 행동에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5월 하순, 그는 “주의 말씀과 뜻”을 부대에 읽어 주었고, “부대원들이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있다는 자신의 느낌과 견해를 밝혔다.” 이에 더하여 그는 “경솔하게 행동하고 하나님을 망각하고 있는 부대와 함께 가느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10명의 의인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차리리 나겠다고” 단언했다. 23 다음 날, 브리검은 부대원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성약을” 맺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성약의 백성답게 처신할 것을 상기시켰다. “저는 우리가 이방인들을 떠나올 때, 행동과 처신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 우리가 회개하고 간악함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제까지보다 더 많은 방해를 받고 더 험한 폭풍우를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꾸짖음 후에는 “형제들을 아주 따뜻하게 축복하고, 그들이 자신의 성약을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했다.”24

1847년도의 이주 대열은 전년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최초의 개척자 부대는 약 1,600km를 111일 동안 이동했지만, 이번 선발대는 1846년에 하루 평균 약 3.3km씩 약 480km를 이동했고, 이 거리는 전년과 비교해 볼 때 하루 평균 네 배가 넘는 속도였다.

몰몬 이주 대열의 성공 요인을 브리검 영의 지도력에 두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브리검은 망설임없이 이 일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는 것은 다 하늘에서 받은 것입니다. … 사람들은 제 지시에 따라 일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그 원인이 제 지혜와 능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그분에게서 받은 예지 덕분이었습니다.”25 1847년에 배운 교훈의 결과로, 브리검 영이 윈터쿼터스에서 느꼈던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주의 말씀과 뜻을 입증하고 또 그 원리를 자신의 인생에 적용했던 브리검은 훗날 회고하기를, “밤낮으로 평안이 충만했고” “어머니 슬하의 건강한 아이처럼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다고 말했다.26

  1. 브리검 영이 제시 시 리틀에게 1847년 2월 26일에 보낸 서한, 브리검 영 사무실 파일,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브리검 영의 설교, 1853년 7월 31일, Journal of Discourses, 26 vols. (London: Latter-day Saints’ Book Depot, 1855–86), 1:166에 출판됨. 이 시기 동안의 브리검 영은 이렇게 묘사되었다. “우리의 회장은 이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의 집합을 전진시키거나 시온의 대업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계속 진행한다. 그는 한눈을 뜨고, 한 발은 침대 밖으로 내놓고 자다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즉시 가서 도움을 준다.”(역사가 사무실, History of the Church, 1847년 1월 7일,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2. Historian’s Office, History of the Church, Jan. 16, 1847.

  3. Historian’s Office, History of the Church, Jan. 27, 1847.

  4. Historian’s Office, History of the Church, Jan. 16, 1847.

  5. 호세아 스타우트의 일기, 1847년 1월 14일, On the Mormon Frontier: The Diary of Hosea Stout, 2 vols., ed. Juanita Brooks (Salt Lake City: University of Utah Press and Utah State Historical Society, 1964), 1:229에 출판됨.

  6. 역사가 사무실, History of the Church, 1847년 1월 14일.

  7. Richard E. Bennett, We’ll Find the Place: The Mormon Exodus, 1846–1848 (Salt Lake City: Deseret Book, 1997), 73.

  8. 교리와 성약 95:8

  9. 계시는 후기 성도를 옛날의 이스라엘과 연관시키는 한편, 리하이와 니파이의 여행과도 연관시켰는데, 이 계시에서 주님은 이렇게 공표하셨다. “또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킬진대, 너희는 번성할 것이요,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리니, …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킬진대, 내가 너희 앞서 길을 예비하리라. 그러한즉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킬진대, 너희는 약속된 땅을 향하여 인도될 것이요, 너희를 인도하는 이가 나인 줄 알리라 하셨음이라. 이뿐 아니라 … 나 주가 너희를 멸망에서 건져 낸 줄을 … 알게 되리라.”(니파이전서 2:20; 17:13~14) 하지만 성약과 순종을 언급한 데는 경고의 의미도 있었다. 1834년에 성도들이 시온을 구속하지 못하자, 주님은 이렇게 밝히셨다. “개개인이 아니요 교회에 관하여 말하거니와 나의 백성의 범법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지금 이미 구속 받았을 것이니라. 그러나 보라, 그들은 내가 그들 손에 요구한 것에 순종하기를 배우지 아니하였고.”(교리와 성약, 105:2~3)

  10. 교리와 성약에서 내내 주님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돌아보아 그들이 고통을 겪지 않도록 그들에게 구제를 베풀[라]”(교리와 성약 38:35) 또한 “너는 가난한 자를 기억하고, … 그들의 생계를 위하여 네 소유 중에서 헌납하[라]”(교리와 성약 42:30)를 포함한 교회의 책임을 분명히 하셨다. 또한 교리와 성약 38:16; 42:31, 34, 39; 44:6; 52:40; 83:6; 84:112; 104:18; 105:3 참조. 성도들이 나부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1845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브리검은 “성도들이 최대한 능력, 즉 모든 영향력과 재산을 이용해 모든 성도를 옮겨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부 성약”에 서명한 사람은 고작 124명뿐이었다. 1847년 대이동부터 시작해 브리검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 책임을 받아들이도록 모든 교회 회원에게 재차 강조했다. History of the Church, 7 vols. (Salt Lake City: Deseret Book, 1976–80), 7:465 참조.

  11. 클라리사 영 스펜서는 이렇게 적었다. “지도자로서 우리 아버지가 지닌 뛰어난 자질 중 하나는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안내하는 일과 더불어 그들의 현세적 및 사회적인 복지를 돌보아 주는 방식이었다.” (Clarissa Young Spencer and Mable Harmer, Brigham Young at Home [Salt Lake City: Deseret Book, 1963], 169) 브리검의 또 다른 딸인 수사 영 게이츠는 아버지가 “설교할 때보다는 신중하게 절제된 사교 활동과 이와 관련된 유쾌함 속에서 신성한 영감을 더 잘 나타냈다고” 느꼈다. 브리검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기준에 맞는 오락을 열정적으로 권장하고, 사람이 지닌 모든 능력과 재능, 감정을 계발하도록 장려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브리검의 현명한 방침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노동으로 힘들었던 수년 동안 쉬는 날도 별로 없었고, 또 유대감과 영적인 사교적 교류의 분위기 속에서 보내는 휴일의 쉬는 분위기를 전혀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Susa Young Gates and Leah D. Widtsoe, The Life Story of Brigham Young [New York: Macmillan, 1930], 266; spelling modernized) 주의 말씀과 뜻의 다른 면들과 마찬가지로, 영감은 주님이 주셨지만, 그것을 구현하고 성공하도록 감독하는 것은 브리검의 몫이었다.

  12. 136편을 받고 나흘 뒤에 그는 “산악지대로 데려갈 가축이 충분하지 않으며” 그런데도 “산악지대로 가는 것에 대해 의심이나 두려움은 없으며, 마치 동방의 보물을 소유한 것처럼 커다란 안전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Historian’s Office, History of the Church, Jan. 18, 1847)

  13. 브리검이 부대원으로 고작 남성 143명에 여성 3명과 어린이 2명을 선발했다고 널리 알려졌지만, 엘리스 임스도 애초에 부대원으로 지명되었었다. 하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질병 때문에 윈터쿼터스를 떠난 직후 낙오되었다. 부대에서 보낸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보통으로 그는 정식 부대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1849년 경, 임스는 유타에 도착했고, 1851년에는 초대 프로보 시장이 되었다. (John Clifton Moffitt, The Story of Provo, Utah [Provo, UT: Press Publishing, 1975], 266) 올슨 에프 휘트니는 “144명이 선발되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볼 때, 그 수는 다른 성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각각에서 열두 명의 대표를 보낸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휘트니가 이렇게 믿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는 “그것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일인지 아닌지 여부는 알 수 없다.”며 그 생각이 대부분 추측에서 나온 것이라고 인식했다. (Orson F. Whitney, History of Utah, 4 vols. [Salt Lake City: George Q. Cannon and Sons, 1892–1904], 1:301)

  14. Historian’s Office, History of the Church, Mar. 3, 1847.

  15. Historian’s Office, History of the Church, Jan. 18, 1847.

  16. Historian’s Office,, History of the Church, 1847년 2월 5일; 노턴 제이콥의 일지, 1847년 5월 28일, The Mormon Vanguard Brigade of 1847: Norton Jacob’s Record, ed. Ronald O. Barney (Logan: Utah State University Press, 2005), 150에 출판됨; 맞춤법 및 대문자 표기는 현대 어법에 맞게 수정함.

  17. The Record of Norton Jacob, ed. C. Edward Jacob and Ruth S. Jacob (n.p.: Norton Jacob Family Association, n.d.), 50.

  18. 교회 본부 역사가 사무실 회의록, 1847년 5월 23일,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맞춤법은 현대 어법에 맞게 수정함.

  19. 교회 본부 역사가 사무실 회의록, 1847년 5월 23일; 윌포드 우드럽의 일지, 1847년 5월 16일, Wilford Woodruff’s Journal: 1833–1898, Typescript, 9 vols., ed. Scott G. Kenney (Midvale, UT: Signature Books, 1983–85), 3:177; 맞춤법은 현대 어법에 맞게 수정함.

  20. 윌리엄 클레이튼의 일기, 1847년 5월 29일, An Intimate Chronicle: The Journals of William Clayton, trade ed., ed. George D. Smith (Salt Lake City: Signature Books, 1995), 333.

  21. Bennett, We’ll Find the Place, 69.

  22. 선발대 부대원들은 이미 4월 초순에 윈터쿼터스에서 서쪽으로 약 32km 떨어진 엘콘 강 부근의 지정된 집결장소에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4월 16일이 되어서야 브리검 영은 부대를 백인, 오십인, 십인으로 구성해 공식적으로 조직했고, 함께 무리를 이뤄 엘콘 강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23. 윌포드 우드럽의 일지, 1847년 5월 28일, Wilford Woodruff’s Journal, 3:186; 맞춤법 및 대문자 표기는 현대 어법에 맞게 수정함.

  24. 윌리엄 클레이튼의 일기, An Intimate Chronicle, 325, 330–31.

  25. 브리검 영의 설교, 1873년 5월 18일, Journal of Discourses, 16:46에 출판됨.

  26. 브리검 영의 설교, 1868년 1월 12일, Journal of Discourses, 12:151에 출판됨; 브리검 영의 설교, 1859년 10월 7일, Journal of Discourses, 7:281에 출판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