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사자와 성명서


사자와 성명서

공식선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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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큐 캐넌의 사진

1890년 10월 6일 월요일 선선한 가을 아침, 7,000명의 후기 성도들이 템플스퀘어에 있는 타원형 태버내클의 긴 나무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반연차 대회를 맞아 성도들은 그들이 선지자, 선견자, 계시자로서 존경하는 이들의 가르침을 듣고자 한 자리에 모였다.

당시에는 연사들의 말씀 순서가 사전에 미리 정해지지 않았었다. 그때는 교회의 회장이 영감이 느껴지는 순간 임무를 지명했으며, 아무도 말씀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 연사 중에는 간략한 개요를 경전에 끼워 오는 이들도 있었으나, 선지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성신이 머릿속을 채워 주리라 믿고 원고 없이 대회에 오는 이들이 많았다.

청중이 모임의 첫 번째 말씀을 기다리는 동안,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은 사람에게 일어나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로 제일회장단 제1보좌인 조지 큐 캐넌 회장이었다. 우드럽 회장이 직접 이 역사적인 모임의 첫 순서를 이끌 것으로 생각했던 캐넌 회장은 무방비 상태로 이 요청에 응했다. 바로 몇 분 전에 솔트레이크시티의 감독인 올슨 에프 휘트니가 (오늘날 공식선언—1로 알려진) 성명서를 낭독했으며, 우드럽 회장은 이 중요한 문서를 통해 복수결혼을 금지하는 법에 순종한다는 뜻을 공표한 상황이었다. 우드럽 회장은 2주 전에 별다른 설명 없이 이 문서를 언론에 공개했었다. 캐넌 회장은 오직 한 가지 사안에만 몰두한 채 초조하게 말씀을 기다리는 수많은 회중을 바라보았다.

캐넌 회장은 말씀하도록 부탁받은 것을 두고 이렇게 기록했다. “말할 수 없이 두려웠다. 이보다 어려워 보이는 일을 요청받은 적은 또 없었던 것 같았다.”1

성도들이 복수결혼을 시행해 온 지도 반세기가 되어 갔다. 여성과 남성들은 이제 자신의 종교에서 가르치고 의도하던 것에 반대되는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결정에 괴로워했다. 그들은 이 원리를 따른다는 이유로 개인적, 집단적으로 고립과 학대, 수감을 당해 왔었다. 그러나 그들은 복수결혼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계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복수결혼을 시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혼이 단련되고, 세상 사람들을 향해 그들의 특징을 규정지어 보일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 무엇으로 그들을 규정할 것인가? 캐넌 회장은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을 통째로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복수결혼을 끝내는 것은 복수결혼을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었다.

휘트니 감독이 성명서 낭독을 마쳤고, 이제 이 사안을 교회에서 “권위 있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지지할지에 대해 거수로 결정짓는 순서가 남아 있었다. 대다수가 찬성했으나, 성명서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손을 들지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연단에 앉아 청중을 바라보던 교회의 지도자들의 눈에, 성명서가 앞으로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불확실함에 불안과 혼란을 느끼며 흐느끼는 남편과 아내들이 들어왔다.2

캐넌 회장은 대다수 사람들과 함께 손을 들어 성명서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이렇게 “극도로 민감한 주제”로 의견이 나뉜 청중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이 무거워 보이는 과제였다. 이 메시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캐넌 회장은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주제를 두고 무슨 말을 전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머릿속이 하얗기만 했다.”3

보좌

조지 퀘일 캐넌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달변가였다. 그는 천성이 친절하고 쾌활한 사람으로, 평생을 말이나 글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십 대 시절 나부에서 교회 신문의 인쇄소에서 수습공으로 일했고,4 나중에는 유타 전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쇄 회사를 설립했으며, 성인이 된 후의 대부분 시간을 자신이 만드는 교회의 신문과 잡지에 사설을 썼다.5

캐넌이 지닌 은사와 그의 강력한 기반을 알아본 브리검 영 회장은 1860년에 그를 사도로 불렀고, 후에는 제일회장단 보좌로 불렀다. 그리고 그는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교회 회장 네 명의 보좌로 봉사했다.

조지 큐 캐넌은 명석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동료 사도들도 교회 지도자 중 그에 필적할 사람은 없다고 여겼다. 사도로서 민감한 연설이나 조심스러운 서한 작성을 요청 받는 사람은 보통으로 조지 큐 캐넌이었다. 비몰몬 언론들은 그를 “몰몬 리슐리외”(프랑스의 추기경이자 정치가—옮긴 이)로 일컬었는데, 그 이유는 그를 모든 몰몬 운동 배후의 주역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6

그러나 주역이라는 명성은 조지 큐 캐넌 회장에게 짐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하지 않은 발상과 자신이 시작하지 않은 운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것이 불편했다. 그는 숨은 주역으로 보이기를 거부했으며, 옆에서 의견을 제시하는 역할이야말로 자신의 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교회를 이끄는 신권 열쇠를 소유한 교회 회장이 아니었다. 혹 다른 이들이 몰랐다 할지라도, 그는 겸손하게 선지자를 따랐다.

반몰몬 움직임

몰몬의 복수결혼 시행을 반대하는 연방 정부의 반몰몬 움직임은 조지 큐 캐넌이 인생에서 겪은 큰 고비 중 하나였다. 그는 8년간 미국 하원의 유타 준주 단독 대표를 지냈으나, 후에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연방법을 위반한 혐의로 의회에서 제명되었다.

캐넌이 복수결혼을 시작한 것은 삼십 대 초반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일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모두 다섯 명의 아내와 마흔세 명의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을 꾸리게 되었다.7 그는 가족을 사랑했다. 1885년부터 1888년까지 그는 결혼에 관한 연방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체포하려는 연방 법원 집행관들을 피해 자주 신분을 감추고 도피생활을 하며 자주 가족을 떠나야 했고, 그런 처지를 슬퍼했다. 그는 가족들 한 명 한 명에게 긴 편지를 쓰고, 가족들이 모일 수 있을 때마다 가족 평의회를 여는 등 최선을 다해 가족을 돌봤다.8 결국 그는 연방 정부에 항복하여 1888년 9월부터 1889년 2월까지 유타 주 형무소에서 5개월간 복역했다.9

정부 관리들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복수결혼의 종료를 알리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오랫동안 압력을 행사했다. 캐넌 회장은 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후에 그의 동료들은 그의 재임 기간을 통틀어 그가 전한 가장 훌륭한 연설은 미국 의회에서 전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그는 동료들 앞에 서서 종교적인 양심을 근거로 복수결혼을 옹호하는 연설을 전했었다.10 그는 온갖 반대에 맞서 복수결혼 관행을 수호하려 했다. 그는 교회가 박해에 시달리던 당시 그의 생각을 이렇게 기록했다. “[복수결혼의 종료를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할] 가능성이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우드럽 회장님도 그렇게 느끼신다. 우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리라고 신뢰해야 한다.”11

캐넌 회장보다 학식은 짧았으나 겸손하고 소박하며 겸허했던 우드럽 회장은 캐넌 회장보다 훨씬 앞서 이 문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12 1889년 가을 무렵 한 스테이크 회장이 우드럽 회장을 찾아와서, 법률에서는 금지하는 복수결혼을 앞둔 남성의 추천서에 과연 자신이 서명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문의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캐넌 회장은 우드럽 회장의 답변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드럽 회장은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현재 이곳 [유타] 준주에서 이런 종류의 결혼을 시행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13

우드럽 회장은 유사한 상황을 들어 그 근거를 설명했는데, 바로 성도들이 박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잭슨 군에 성전을 짓지 못하게 되자, 주님께서 성도들의 헌물을 받으시고 본래 명하신 것은 연기하셨던 일을 예로 든 것이었다.14 우드럽 회장은 이제 복수결혼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 뒤 캐넌 회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늘 조심스럽고 신중했던 캐넌 회장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이때까지 교회는 복수결혼을 금지하는 연방 정부의 법을 양심에 따라 거부하고 있었다. 캐넌의 일지에 따르면, 그 일은 그가 교회의 회장이 복수결혼 금지 문제에 관하여 명백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것이었다고 한다. 캐넌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우드럽 회장님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15

성명서

1890년 9월 23일 아침, 캐넌 회장은 평소처럼 솔트레이크시티의 비하이브 하우스 바로 남쪽의, 제일회장단 사무실이 있는 빅토리아풍 건물인 가르도 저택으로 갔다. “우드럽 회장님은 이 나라 사람들 앞에 우리를 드러내어 비방하고 우리가 우리의 가르침과 관행에 어긋나는 성명을 하도록 적들이 해 온 일들을 생각하시며 감정이 퍽 격해진 모습이셨다.”16 그때는 유타에서 반일부다처제 법 집행을 위해 연방 정부가 임명한 소규모 사람들로 이루어진 유타 위원회가 교회의 지도자들이 계속하여 유타에서 일부다처제를 가르치고 복수결혼을 승인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발표한 터였다. 캐넌은 교회가 그에 반박하는 성명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드럽 회장은 그보다 강력한 조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17

우드럽 회장은 제일회장단 비서인 조지 깁스를 불러 함께 제일회장단 사무실과 연결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교회 회장이 생각한 바를 불러 주면 깁스가 그대로 받아 적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사무실로 나온 우드럽 회장은 “얼굴이 기쁨으로 빛났고 매우 흐뭇하고 흡족해하는 모습이었다.”18 우드럽 회장은 받아 적은 글을 캐넌 회장에게 읽어 주라고 부탁했다. 캐넌은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출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생각이 잘 드러나는 아주 좋은 글이었다. 나는 회장님께 잘 되리라고 말씀드렸다.”19

우드럽 회장의 요청으로,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임무 때문에 외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일원들은 이 문서의 내용을 듣기 위해 즉시 솔트레이크시티로 모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날 오후, 제일회장단의 조지 큐 캐넌과 조셉 에프 스미스와 더불어 세 명의 사도가 문서 수정을 논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문서에 이들 수정안을 포함한 뒤 즉시 출판될 수 있도록 언론사로 보냈다.20

캐넌 회장은 그날 자신의 일지 기록에 우드럽 회장이 구술한 것을 기록한 원본과 자신이 제안한 수정안을 함께 남겼다.21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은 미래의 세대들을 위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말하거나 행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행한 것으로 오인당한 일이 많았다.” 그는 보좌가 아닌 교회의 회장이 성명서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모든 것이 우드럽 회장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우드럽 회장님은 주님께서 그 일이 우드럽 회장님의 의무라는 것을 명백히 밝혀 주셨으며, 자신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데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22

말씀

1890년 10월의 그날, 연차 대회에 모인 회중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 태버내클의 단상에 서던 조지 큐 캐넌의 머릿속에는 이제 한 가지 분명한 확신만이 남아 있었다. “무엇이든 주님의 영이 주시는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23

캐넌 회장은 청중과 마주하자 하얗기만 하던 머릿속이 갑자기 경전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일 년 전에 우드럽 회장이 스테이크 회장을 만났을 때 인용했던 교리와 성약 124편의 구절이었다. 캐넌은 49절로 말씀을 시작했다. “내가 사람의 아들 가운데 어떠한 자들에게 내 이름을 위하여 일을 하라는 명령을 주어, 그 사람의 아들들이 그 일을 수행하려고 가서 자기들의 능력을 다하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다하[는데,]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그 일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때에는, 보라, 그 사람의 아들들의 손에 더 이상 그 일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헌물을 받음이 내게 마땅하도다.”24

조지 큐 캐넌은 성명서가 경전에 등장하는 선례에 근거를 둔다는 점에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우드럽 회장은, 태초부터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곳에서 주어진 주님의 말씀을 다른 곳에 적용하라는 영감을 받았던 것이다. 캐넌 회장은 말했다. “이(교리와 성약 125:49)를 근거로 우드럽 회장님은 이 성명을 발표함이 합당하다는 사실을 몸소 느끼셨습니다.”25

캐넌의 혀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분에 걸쳐, 그는 청중을 매료시켰다. 나중에 그는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매우 자유롭고 수월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26

그는 태버내클에서 말씀을 시작하며 자신이 복수결혼을 철저히 옹호하던 사람이었음을 인정했다. “공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저는 복수결혼에 대한 제 믿음을 천명해 왔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저는 복수결혼을 옹호했습니다.” 물론, 이 믿음의 뿌리는 하나님께서 그가 복수결혼을 시행하기 바라신다는 믿음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만 말씀을 전했다. “저는 복수결혼을 시행하라는 계명을 제가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여겼습니다.”27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캐넌의 생각이 아니었다. “저는 수십 번도 넘게 [복수결혼을 끝내기 위해] 조처가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영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느낌을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관해 주님께서 나서시기를 기다려 왔습니다.”28

그런데 성명서를 둘러싼 영의 느낌이 달랐다. 캐넌은 마침내 주님께서 변화를 부르셨음을 확신했다. [우드럽 회장님은] “글을 쓰기로 마음 먹으셨고, 영의 인도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회장님은 그 일에 관해 기도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시기를 거듭 간구하셨습니다.” 캐넌은 전적으로 성명서를 지지했다. “저는 이 성명서가 옳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여러모로 저의 개인적인 바람과는 상치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29

그는 청중에게 자신이 후기 성도들 사이에서 성명서에 대한 반응이 두 가지로 갈리는 모습을 보았노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취한 조치의 필요성을 느끼고 가슴 깊이 슬퍼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의기양양하게 “내가 그랬지? 결국 그렇게 될 거라고 했잖아?”라며 자축하는 이들도 있었다. 후자인 이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결론을 내리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질책했다. 그들은 지도자들이 더 서둘렀더라면 교회 회원들이 많은 세월 동안 고통받으며 가슴 아파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0

캐넌은 자신의 관점은 이 후자의 의견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저는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그리고 모든 하늘과 땅 위에 그것이 진실로 우리에게 소중한 원리였음을, 어떤 면에서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원리였음을 우리가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고 믿습니다. 저에게 법을 따를 것을 제안하셨던 분들이 말씀하신 시점에서 우리가 복수결혼을 내려놓았더라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원리를 수호하겠다는 성도들의 의지에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 겪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은 하늘에서 그들에게 축복으로 돌아갈 것이다.31

결론

캐넌 회장이 자리로 돌아가 앉은 뒤, 우드럽 회장은 다시 한번 그의 보좌를 놀라게 했다. 그가 직접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일어선 것이다. 우드럽 회장은 보좌의 말씀이 곧 자신의 말씀이라고 확인하며 이렇게 전했다. “조지 큐 캐넌 형제님은 저희의 입장을 여러분께 밝혀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여, 주님께서는 저나 이 교회의 회장의 직을 맡는 다른 어떠한 사람도 여러분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도록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 일은 계획되어 있지 않습니다.”32

캐넌은 대회에 풍성하게 임한 성령이 주님께서 성명서를 승인하셨음을 증거한다고 생각했다. “주님의 영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분명 모든 충실한 성도가 주님께서 친히 이 일에 참여하셨고, 이 일이 그분의 승인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주님께 받았을 것이다.”33

캐넌은 그날의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의 행동에 대해 내 생각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옳음을 안다. 또한, 우드럽 회장님께서 올바른 걸음을 내디디셨음을 나는 분명히 안다.” 우드럽 회장은 계시의 전달자였으며, 보좌로서 캐넌이 할 일은 그가 온 생애 동안 그러했듯 하나님의 계시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것이었다. 캐넌은 말했다. “나는 주님께 다음과 같은 증거를 얻었다. 이 일로 우리가 희생을 치른 것과, 우리에게서 복수결혼을 그만두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자행된 모든 일에 저항하며 우리가 지금껏 굳건하게 버텨온 것을 주님께서 받아들여 주실 것이며, 이제 그분은 사실상 ‘그만하면 되었다.’라고 말씀하시니 우리는 이 일을 주님의 손에 맡긴다.”34

  1. George Q. Cannon journal, Oct. 6, 1890, Church History Library, Salt Lake City.

  2. Marriner Wood Merrill journal, Oct. 6, 1890, Church History Library, Salt Lake City. 그날 연단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던 히버 제이 그랜트는 거수가 시작되자 여러 청중의 “눈이 젖어 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Heber J. Grant journal, Oct. 6, 1890, Church History Library, Salt Lake City 참조)

  3. George Q. Cannon journal, Oct. 6, 1890.

  4. 캐넌의 개종에 관하여, Davis Bitton, George Q. Cannon: A Biography (Salt Lake City: Deseret Book, 1999), 33–34 참조. 캐넌의 가족들은 캐넌의 삼촌이자 후에 교회의 회장이 된 존 테일러의 도움으로 교회에 개종했다. 테일러는 나부에서 교회 신문을 편집했고 캐넌은 삼촌 밑에서 일하며 인쇄 업무를 익혔다.

  5. 이러한 신문과 잡지로는 Deseret News, the Western Standard, the Millennial Star, the Juvenile Instructor 등이 있다.

  6. Arthur I. Street, “The Mormon Richelieu,” Ainslee’s Magazine, vol. 4 (1899), 699–706.

  7. 캐넌의 아내들은 모두 33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는 두 자녀를 입양했고, 캐롤라인 영과 마크 크록살이 이혼하자 그들이 낳은 여덟 명의 자녀들을 자신에게 인봉했다. 나중에 캐넌은 캐롤라인 영과 결혼했다. 캐넌의 아내들과 자녀들에 관하여, Bitton, George Q. Cannon, 373–85, 463–64 참조.

  8. Bitton, George Q. Cannon, 373–90. 캐넌의 일지에는 곳곳에 가족 평의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예를 들어 George Q. Cannon journal, Mar. 17, 1891 참조.

  9. Bitton, George Q. Cannon, 291–96.

  10. Journal History, Apr. 13, 1901, 3, Church History Library, Salt Lake City; George Q. Cannon journal, Nov. 24, 1889. 이 연설은 하원에서의 고별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요약본을 보려면, Bitton, George Q. Cannon, 254–57 참조.

  11. George Q. Cannon journal, Aug. 15, 1889.

  12. 캐넌은 우드럽 회장을 “겸손하고 소박하고 겸허하며, 내가 본 중에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 (George Q. Cannon journal, Mar. 3, 1889) 으로 묘사한 바 있다.

  13. George Q. Cannon journal, Sept. 9, 1889.

  14. 교리와 성약 124:49.

  15. George Q. Cannon journal, Sept. 9, 1889.

  16. George Q. Cannon journal, Sept. 23, 1890.

  17. George Q. Cannon journal, Sept. 23, 1890.

  18. Elder Franklin D. Richards, Heber J. Grant journal, Sept. 30, 1890에 인용됨.

  19. George Q. Cannon journal, Sept. 23, 1890.

  20. George Q. Cannon journal, Sept. 24, 1890.

  21. 캐넌이 아홉 개의 수정안을, 십이사도 정원회의 다른 일원들이 두 개의 수정안을 내놓았다. 캐넌의 수정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네 번째 문단에 “본인이 감리하는 교회 회원들도 똑같이 행하도록 그들에 대한 나의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이라는 부분을 첨가하자는 의견이었을 것이다. (George Q. Cannon journal, Sept. 24, 1890 참조)

  22. George Q. Cannon journal, Sept. 24, 1890. 성명서를 받아들이는 것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추가 정보는 다음을 참고한다. 복음 주제, “성명서와 복수결혼의 종료”, lds.org/topics.

  23. George Q. Cannon journal, Oct. 6, 1890.

  24. 교리와 성약 124:49. 캐넌이 전한 말씀은 다음 자료에 그대로 실렸다. President Woodruff’s Manifesto: Proceedings at the Semi-Annual General Conference of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Monday Forenoon, October 6, 1890 (Salt Lake City: 1890)

  25. President Woodruff’s Manifesto, 3.

  26. George Q. Cannon journal, Oct. 6, 1890.

  27. President Woodruff’s Manifesto, 3. 캐넌은 다른 글에 이렇게 적었다. “유타 사람들은 복수결혼이 보편화 되어야 한다거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유타에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남성 인구가 여성 인구보다 많기 때문이다.” (Bitton, George Q. Cannon, 256–57)

  28. President Woodruff’s Manifesto, 6.

  29. President Woodruff’s Manifesto, 6.

  30. President Woodruff’s Manifesto, 4–5.

  31. President Woodruff’s Manifesto, 4–5.

  32. President Woodruff’s Manifesto, 9–10.

  33. George Q. Cannon journal, Oct. 6, 1890. “나는 주님께서 받아들이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이 우리 앞에 충분히 드러났음에 감사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났을 것이고 그들은 주님께서 성명서 때문에 그분의 영을 내려 주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이보다 더 훌륭한 대회가 없었다고 간증했다.” (George Q. Cannon jounal, Oct. 6, 1890)

  34. George Q. Cannon journal, Oct. 6, 1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