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머시 톰슨과 결혼에 대한 계시


머시 톰슨과 결혼에 대한 계시

교리와 성약 13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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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시 필딩 스미스

로버트 톰슨은 1841년 가을에 인생의 절정기에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그는 미시시피 강둑의 모기가 들끓는 늪지에서 많은 후기 성도들을 괴롭힌 말라리아 열병의 희생자 였다. 조셉 스미스의 개인 서기겸 교회 신문인 Times and Seasons의 공동 편집자였던 톰슨은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건강했던 그가 열흘 뒤에, 서른 살의 나이로 아내와 세살박이 딸을 홀로 남겨두고 죽고 말았다.

톰슨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그를 “사랑이 가득한 남편이며, 자상한 아버지였고 진실하고 충실한 친구”1로 기억했다. 그의 아내 머시는 생의 마지막에 그가 보여준 용기에 감탄했다. “그는 큰 인내심을 갖고 고통을 참았으며, 불평의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간증했다고 머시는 말했다. “내가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먼지 더미에서 일으켜 세워졌으며 지도자들과 함께 세움을 빋았다.”2

가족 중에 일찍 사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흔한 일이었다. 주로 여자가 아이를 낳다가 많이 죽었으며, 어머니의 부드러운 보호의 손길없이 자라야 하는 어린 아기들을 남겨두고 사망했다. 20세기 산업화 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서 대부분의 가족들이 유아나 어린 아이를 사고나 질병으로 잃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태초부터, 죽음은 인생의 허무함과 지속적인 삶에 대한 우리의 염원을 상기시켜주었다.

이 사망의 문화를 초월하고 대항하는 계시가 조셉 스미스에게 주어졌고 이 계시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관계들이 다음 세상에서 지속될 수 있다고 약속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들은 다시 함께 할 수 있고, 우리의 가족 관계와 우정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이 약속에 대한 조건들이 오늘날 교리와 성약 132편으로 알려진 계시에 나와 있다.

하늘과 지상

하늘에 대한 두 가지 주요 관념이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지배적으로 존재해 왔다. 3 가장 보편적인 관념은 서로 혼연 일체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따로 떨어져 홀로 있는 천사들의 모습이다. 이 관념은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선을 긋고 있고 사후 세계의 예지에 가장 큰 가치를 두었다. 인간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위대함에 대한 사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지상에서의 관계들은 일시적이며 그러므로 죽으면 끝이 난다.4

또 다른 주요 관념은 사후 세계에서 친구들과 가족의 존재를 강조한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지속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회가 영원한 행복의 본질이 된다. 물리적인 세계와 영원한 세계가 중첩되며 평범한 인생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의 일부가 된다. 사회적 하늘에 대한 관념은 19세기에 널리 퍼졌다. 미국 소설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펠프스는 남북 전쟁에서 가족들을 잃은 세대에게 이 관념을 크게 주지시켰다. 펠프스의 소설 The Gates Ajar는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두 영혼이 이곳에서 함께 성장하도록 하신 다음 단 하루 동안 떨어져 있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강제로 영원히 둘을 갈라 놓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하실 일인가?”5

1843년 7월에 기록된 결혼에 대한 조셉 스미스의 계시는 펠프스 한 것처럼 감상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을 어려움 없이 제시하고 있다. 이 계시는 인간 관계가 지속될 것이나 조건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모든 사회적 관계에 대한 헌신은 영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하늘에서 처럼 지상에서 인봉할 수 있는 신권 권세를 지닌 사람에 의해 집행되지 않으면 죽을때 끝난다. 132편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지속되는 결혼은 “현세와 영원을 위하여” 언약을 맺고 “내가 이 권능에 임명한 자를 통하여 … 약속의 성령으로 인봉[된다.]” 죽은 자의 부활 전에 이 성약을 맺지 않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천사”가 되고 “따로 떨어져 홀로 있게”된다. 6

머시와 로버트

머시 레이첼 필딩은 1807년 런던에서 북쪽으로 96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의 소작농인 독실한 감리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이십사 세에 그녀는 캐나타 요크(지금의 토론토)로 오빠 조셉과 함께 이주했다. 곧이어 그들의 자매인 메리도 왔고, 이 세 사람은 기존의 모든 교회들이 부패했다고 믿는 감리교도인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1836년 봄에 선교사 팔리 피 프랫이 요크에 도착했을 때 이 세 사람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머시, 메리, 조셉은 지역 개울에서 침례 받았고 이듬해 봄에 교회 본부가 있는 오하이오 커틀랜드로 이주했다.7

캐나다에서, 머시는 여러 면에서 자신과 입장이 비슷한 로버트 블라쉘 톰슨을 만났다. 1811년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에 영적 은사의 회귀를 추구하는, 원시 감리교파회 라고 불리는 반대파 집단에 속했다. 그는 1834년 캐나다로 이주했고 팔리 피 프랫의 메시지를 들은 후, 필딩스 남매들과 같은 달에 침례 받았다. 로버트 톰슨과 머시 필딩은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이었으며, 커틀랜드에 도착한 직후인 1837년 6월에 결혼했다.8

결혼 후, 머시의 자매인 메리는 조셉과 하이럼 스미스의 사촌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이 형제들과 더 자주 접하게 되었으며, 곧 이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이럼의 아내 제루샤가 1837년 가을에 난산을 한 후 10살 미만의 다섯 아이들을 남겨 놓고 사망했을 때 메리는 하이럼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꼈다. 조셉은 주님께 하이럼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쭈었다. 응답은 메리 필딩과 즉시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조셉의 영감을 믿은 메리는 1837년 성탄절 전야에 하이럼과 결혼했다.9

그 이후부터, 머시와 로버트의 삶은 메리와 하이럼의 식구들과 친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하이럼은 1838년에 오하이오에서 성도들이 재정착한 미주리까지 1,600 킬로미터 여행에서 톰슨 가족을 인도했다. 후에, 하이럼과 조셉이 리버티 감옥에서 투옥되었을 때, 머시와 메리는 2월의 추운 밤에 새로 태어난 하이럼의 장차 선지자가 될 아들인 조셉 에프를 데리고 그들을 방문했다. 역시 최근에 아이를 낳은 머시는 메리가 너무 아파 젖을 줄 수 없을 때 조셉 에프에게 젖을 주었다. 머시와 로버트는 하이럼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메리와 하이럼의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나부에서는 두 가족이 나란히 집을 지었다.10

스미스 가족과 톰슨 가족은 로버트가 사망한 후에 더욱 가까워졌다. 1843년 봄 어느 날 밤에, 머시는 메리의 집에서 자고 있었다. 하이럼이 사업차 나부를 떠나 있을 동안 메리와 함께 있어 주기 위해서 였다. 머시는 동산에서 로버트와 함께 서 있는 꿈을 꾸었다. 머시는 누군가가 그들의 결혼 서약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다양한 방법들에 익숙한 머시는 그 꿈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로 이해했다. “이 꿈에 깊은 감명을 받은 채로 아침에 눈을 떴으나, 그 꿈을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11

그날 밤에, 하이럼이 집으로 돌아왔고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매우 놀라운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그는 작고한 부인 제루샤와 어려서 죽은 그들의 두 아이들을 보았다.12 하이럼 역시 머시처럼 그 꿈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꿈을 꾼 시간이 예사롭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마자, 하이럼은 그의 형제인 조셉에게서 그의 집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놀랍게도,” 머시는 이렇게 말했다. 하이럼은 조셉이 “현세만의 결혼 서약은 현세에서만 지속되고 영원을 위해 새로운 서약을 맺지 않으면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13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계시는 후에 교리와 성약 132편에 기록되어 공식적으로 경전 말씀이 되었다.14

로버트 톰슨은 죽었고, 제루샤 스미스도 죽었다. 배우자 중 한쪽 만이 살아 있으면 새로운 결혼 서약을 어떻게 맺는단 말인가? 조셉 스미스는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자를 위한 대리인으로 행사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1840년 가을부터, 성도들은 회복된 복음에 관해 듣지 못하고 사망한 조상들을 위해 대리 침례를 행했다. 이제 같은 원리가 결혼에도 적용된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인봉”될 수 있고, 그들이 땅에서 맨 것같이 하늘에서 맬 수 이게 되었다.15 “죽음이 둘을 갈라 놓을 때까지” 현세에서 끝났던 결혼 관계가 신권 권세에 의해 “현세와 영원을 위해” 다시 집행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결혼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게 되었다.16

머시는 이 가능성에 무척 기뻤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머시가 로버트와 함께 영원히 살기를 선택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머시는 그를 그리워했고 그 옆에 있고 싶었다. 그는 머시가 자신이 가장 되고 싶은 사람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영감을 준 그런 남자였다. 머시는 로버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온유함, 겸손, 정직 면에서 그보다 더 낳은 사람은 없을 거에요.”17

1843년 5월 하순 경 어느 월요일 아침에, 머시 톰슨과 자매인 메리는 하이럼과 조셉 스미스와 함께 조셉의 집 이층 방에서 모였다. 조셉은 머시와 로버트의 현세와 영원을 위한 결혼을 집행했으며, 하이럼이 로버트를 대리했다.18 이 의식에 이어서, 조셉은 하이럼과 메리의 현세와 영원을 위한 결혼을 집행했다. 머시는 한없이 기뻤다. 머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빅토리아 여왕의 영광을 부러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계시를 통해 죽은 남편에게 인봉된 이 경륜의 시대의 여성들 명단 가운데 내 이름이 첫 번째로 나오는 한 아닙니다.”19

복수 결혼

죽은 남편에게 인봉된 것은 외롭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머시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먼 미래, 톰슨 부부가 재결합하게 될 언제인지 모를 날에 적용되었다. 그때 까지, 머시는 앞날이 창창했고 자녀들을 돌보아야 했다. 누가 가족을 부양할 것인가? 머시가 살았던 시대에는 여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거의 없었다. 로버트가 죽은 후, 머시는 과부들이 수 세기 동안 해왔던 일, 즉 방을 다른 사람들에게 세주었다. 머시는 이렇게 말했다. “부지런함과 주님의 축복으로 우리의 필요 사항은 충족되었습니다.”20

그래도 여전히 “외로운 삶이었고” “그렇게 훌륭한 남편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상실감 때문에 슬퍼한 나머지 내 건강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후기 성도들은 지상이 하늘의 교통으로 가득하며,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해주는 천사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 해 여름에 천사가 조셉 스미스를 방문했다. 그의 전 서기였던 로버트 톰슨이었다. 머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조셉]에게 몇 차례 나타나 그에게 내가 그렇게 외로운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 천사는 충격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머시는 이렇게 회상했다. “하이럼이 나를 현세를 위해 인봉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21 다르게 말하자면, 로버트 톰슨은 하이럼에게 머시를 복수 부인으로 맞아 이 생, 곧 “현세”를 위한 결혼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 동안에, 머시와 로버트는 영원히 인봉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로버트 톰슨이 나타난 그 시기에, 조셉 스미스는 그의 붉은 벽돌 상점 뒤편의 작은 사무실에서 132편을 쓰고 있었고 그 계시를 서기 윌리엄 클레이튼에게 받아쓰게 했다. 22 그 계시의 여러 부분들은 오래 전부터 조셉이 알고 있었고, 아마도 그가 구약을 영감역 하고 있을 때인 1831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23 조셉은 하나님께 기도로 여쭈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및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처와 첩들을 [두는 것을]” 정당화 하셨는가? 그에 대한 응답은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았다. 조셉 자신의 문화와 자라온 환경에서는 복수 결혼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시는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응답했다. 하나님은 복수 결혼을 명했다. 그리고 고대 선지자들은 “명함을 받은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은 … 그들의 승영에 들어[갔다.]”24

132편은 그러므로 서양 문화에서 오랫 동안 논란이 되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고대에 복수 결혼을 승인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 어거스틴은 구약의 복수 결혼은 각 나라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속될 것임을 상징하는 “성찬”이었다고 생각했다.25 마틴 루터도 이에 동의했다. 아브라함은 순결한 남자였고 그가 하갈과 결혼한 것은 그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신성한 약속을 성취시켰다.26 루터는 하나님께서 제한된 상황에서 현대에도 복수 결혼을 승인하실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이렇게 관찰했다. 그것은 “더 이상 계명은 아니지만 금지되지도 않았다.” 27

논란의 다른 한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복수 결혼을 실행해서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루터의 16세기 동시대 인물인 존 캘빈은 복수 결혼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의 단수 결혼으로 구축된 ’창조의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고 믿었다.28 캘빈은 초기 미국의 종교적 관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든 미국인들이 고대 선지자들이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조셉 스미스 시대 사람들은 현대의 복수 결혼은 어떤 상황에서도 잘못이라고 믿는 캘빈을 관점을 전적으로 따랐다.29

132편은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음성으로 고대 선지자들의 행위를 승인하면서 이 논란을 불식시켰다. 이 계시는 복수 결혼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가 “별처럼 셀수 없이 계속되리라”고 하신 약속을 이루었다고 말했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시는 단순히 고대 선지자들의 복수 결혼을 정당화시키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담대하게 행했다. 아브라함의 씨인 후기 성도들은 한 동안 복수 결혼을 실행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아브라함의 일을 하라.”31

조셉 스미스는 처음에 복수 결혼을 망설였다. 그로 인해 교회가 받을 박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미국에서 법적으로 용인되는 유일한 결혼의 형태는 단수 결혼이었으므로, 반대가 극심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조셉 자신도 복수 결혼의 합당성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천사가 그에게 세 번이나 나타나 지시받은 대로 행하라고 권고했다.32 그는 결국 복수 결혼을 했으며 1841년 나부에서 다른 회원들에게 이 원리를 가르쳤다. 이 계시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그가 더 쉽게 이 새로운 계명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이 계명은 조심스럽게 점진적으로 소개되었다.33

머시와 하이럼

머시에게는 복수 결혼 보다는 영원한 결혼이 훨씬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자라온 환경과 개인적 성향으로 인해, 머시는 이미 결혼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반대했다. 자매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메리와 같은 집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에도 머시의 불편한 느낌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메리가 이야기 하면 머시가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 조셉은 이 문제를 머시와 상의하도록 메리를 보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머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일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일은 내가 지켜온 전통의 핵심을 흔드는 것이었고 타고난 내 마음의 감정은 이를 반대했습니다.”34

다음에는 하이럼이 머시에게 이야기 했다. 자신도 한때 복수 결혼을 반대했던 그는 머시의 감정을 이해했다. 조셉은 하이럼이 하나님으로부터 설득을 당할 때까지 하이럼의 감정을 살피며 이 가장 어렵고 논란적이 가르침을 나누는 것을 보류했다. 하이럼은 자신이 영원토록 떨어질 수 없는 두 여인과 지상에서 결혼했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이 원리를 받아들였다. 같은 날 그는 메리에게 현세와 영원을 위해 인봉되었고, 하이럼이 제류샤에게 인봉될 때 메리가 제루샤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해서 하이럼은 두 아내 모두와 영원히 인봉되었다.35

머시는 하이럼 스미스의 영원한 아내가 되라는 요청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로버트 톰슨의 메시지는 머시의 말을 빌리자면, 하이럼이 “부활의 아침에 나를 내 남편인 로버트 블라쉘 톰슨에게 전달해 줄” 그 때까지 하이럼이 머시와 현세만을 위한 결혼을 하라는 것이다.36 하이럼과의 결혼은 구약에서 남자가 죽은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라는 명을 받은 형사취수제와 비슷한 것이었다.37 이 고대의 관행과 천사의 나타남의 조합은 하이럼 스미스와 같이 성경 진리의 회복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는 머시에게 그가 로버트 톰슨의 요청을 처음 들었을 때,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성령을 느꼈다[고]” 말했다.38

나부에서 복수 결혼을 받아들인 후기 성도 여성들은 종종 그들의 결정을 확인시켜 주는 영적인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빛을 보았거나, 화평을 느꼈거나, 한 경우에는 천사를 보기도 했다. 머시 톰슨은 그러한 경험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나중에 머시는 그 원리를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스스로 성경에서 그것에 대해 읽고, 그것이 그 시대에 행해졌으며, 주님께서 용인하시고 승인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39

그러나 성경의 논리 하나 만으로는 머시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조셉은 결국 직접 머시와 이야기 했으며, 그의 간증은 머시의 마음을 돌이켰다. 조셉은 로버트 톰슨이 그에게 한 번 이상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나타났을 때는 “아주 강력하게 말해서 그를 떨게 했다[고]”고 말했다. 처음에 조셉은 그 요청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주님께 기도하고나서 “내 종이 요청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안 후에야 하이럼에게 그 시현에 대해서 말했다. 40

영적 은사를 믿는 머시 톰슨은 작고한 남편이 말했다는 것을 믿었다.41 그리고, 조셉 스미스를 6년 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머시는 그가 “잘못을 범하기에는 너무 현명하고 불친절하기에는 너무 선하다”는 것을 믿었다.42 머시는 하이럼과 결혼하라는 요청은 “선지사 조셉 스미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 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43

조셉 스미스는 머시 톰슨과 같은 여성의 반대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남자든 여자든 복수 결혼을 처음부터 쉽게 받아들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44 조셉은 자신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남성들에게 복수 결혼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성들에게도 강요하지 않았다.45 남녀 모두에게 심사숙고하고 기도하며 스스로 결정하라고 권고했다. 머시는 종이에 씌여진 계시의 사본을 요구했고 자기 집에 4~5일간 갖고 있으면서 그 내용을 공부했다.46 많은 기도와 심사숙고 끝에 결국 동의했다. 1843년 8월 11일에, 조셉 스미스는 나부 워터앤배인가 모퉁이에 있는 메리와 하이럼의 집에서 하이럼과 머시의 결혼을 집행했다. 조셉이 추천한 대로, 하이럼은 집에 방 하나를 더 들었고, 머시는 그 곳으로 이사했다.

현세와 영원

그들이 함께 산 짧은 기간 동안, 하이럼의 일은 머시의 일이 되었으며, 머시의 일은 하이럼의 일이 되었다. 머시는 하이럼이 교회의 축복사로서 교회 회원들을 축복할 때 그의 입에 흘러나오는 영감적인 말들을 적는 것을 도왔다. 사람들이 가장 크게 마음을 쏟은 일은 나부 성전이었다. 머시는 성전 완공을 촉진시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고 주님께 진지하게 기도한 후,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리와 못을 살 수 있게 자매들에게 일주일에 일센트씩 헌금하도록 권유하라.” 머시는 하이럼이 이 계시에 “매우 기뻐했으며” 대중에게 머시가 요청한대로 헌금하라고 권고하면서 일을 진척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말했다.47 하이럼의 도움으로, 머시와 메리는 그 시대에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닌 1,000달러를 모금했다.48

머시와 하이럼은 카테지에서 폭도의 총알이 하이럼의 목숨을 앗아갈 때까지 단지 10개월간만 결혼 생활을 했다. 머시는 인생의 절정기에 또다시 남편을 잃고 말았다. 머시는 하이럼을 잃은 슬픔에 잠겼다. 머시는 하이럼을 “애정이 넘치는 남편, 사랑이 많은 아버지, 충실한 친구,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부양자”로 묘사했다.49 그러나 메리와의 유대는 항상 머시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머시와 이제 여섯 살이 된 머시의 딸 메리 제인은 메리와 그녀가 하이럼과 낳은 두 자녀와 메리가 서모 역할을 한 하이럼과 제루샤 사이에서 낳은 다섯 자녀와 함께 집을 돌보아야 했다.

1846년, 머시와 메리는 그들의 오빠 조셉과 함께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그들은 그 당시 미국 경계 밖에 있었던 새로운 시온을 향해 2,250 킬로미터를 여행하며 갖은 고난을 겪은 수 천 명의 성도들과 함께 했다. 그들은 다음 해에 솔트레이크밸리에 도착했다. 메리는 1852년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후 머시는 솔트레이크에서 40년을 살았으며, 메리와 하이럼이 남겨 놓은 아이들을 키우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교회에 봉사하며 끝까지 충실했다.

하이럼과의 유대는 늘 깊은 감사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머시는 젊은 시절에 선택한 “사랑하는” 남편 로버트와의 재결합을 고대하며 살았다. 1893년에 죽음을 통해, 머시는 그녀가 로버트와 결혼할 때 얻은 이름인, 머시 알 톰슨 이라는 이름을 다시 얻게 되었다. 교리와 성약 132편은 머시에게, 충실하다면 언젠가 로버트와 함께 “왕위와 왕국과 통치권과 권세…를 상속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들은 “영원무궁하도록 자손이 … 계속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50 그녀는 이 약속을 믿었으며 이 약속이 실현될 수 있게 충실히 살았다.

  1. “Death of Col. Robert B. Thompson,” Times and Seasons, 1841년 9월 1일, 519쪽.

  2. 머시 필딩 스미스, 머시 알 톰슨이 쓴 로버트 비 톰슨 전기, 1854년 11월,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톰슨의 말은 시편 113:7~8을 인용한 것이다.

  3. 콜린 맥다넬과 버나드 랭, Heaven: A History (뉴헤이븐, 코네티커트: 예일 노타 벤, 2001년).

  4. 잰 스완고 에머슨과 휴 파이스 편집, Imagining Heaven in the Middle Ages (뉴욕: 갈랜드, 2000년); 제프리 버튼 러셀, A History of Heaven: The Singing of Silence (프린스턴, 뉴저지: 프린스턴 대학교 신문, 1997년). 세익스피어는 결혼을 상해서 못 먹을 때까지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음식과 비교했다. 리사 홉킨스, The Shakespearean Marriage: Merry Wives and Heavy Husbands (런던: 맥밀런, 1998년), 70~71쪽 참조.

  5.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펠프스, The Gates Ajar, 4집, (런던: 샘프슨, 로, 선, 그리고 말스턴, 1870년), 54쪽 펠프스의 높은 인기에 대해, 맥다넬과 랭, Heaven, 265~66쪽을 참조한다. 비슷한 주장을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찾을 수 있다. 바튼 리바이 세인트 알맨드, “Paradise Deferred: The Image of Heaven in the Work of Emily Dickinson and Elizabeth Stuart Phelps,” American Quarterly, 29권 (1977 춘계), 55~78쪽 참조.

  6. 교리와 성약 132:7, 15~18. 더욱이, 이 계시는 생명 창조 즉 “자손이 … 계속되는 것” (교리와 성약 132:19)을 내세에서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기존의 내세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초월했다.

  7. 레오나드 제이 애링턴, 수잔 애링턴 매드슨, 에밀리 매드슨 존스, Mothers of the Prophets, 개정판. (솔트레이크시티: 데저렛 출판사, 2009년), 88~95쪽; 팔리 피 프랫, The Autobiography of Parley Parker Pratt (뉴욕: 러셀 브라더스, 1874년), 146~54쪽.

  8. 톰슨, 머시 알 톰슨이 쓴 로버트 비 톰슨 전기

  9. 애링턴, 매드슨, 존스, Mothers of the Prophets, 96~98쪽; 제프리 에스 오드리스콜, Hyrum Smith: A Life of Integrity (솔트레이크시티: 데저렛 출판사, 2003년), 163~64쪽.

  10. 제니퍼 리더, “‘The Blessing of the Lord Has Attended Me’: Mercy Rachel Fielding Thompson (1807–1893),” 리처드 이 털리와 브리태니 에이 채프맨 편집, Women of Faith in the Latter Days: 1권, 1775~1820년 (솔트레이크시티: 데저렛 출판사, 2013년), 424~25쪽. 스미스 가족은 149블록의 3번 필지에, 톰슨 가족은 같은 블록의 1번 필지에, 두 집의 뒷 마당이 서로 맞닿게 집을 지었다.

  11. 머시 레이철 필딩 톰슨, 회고록, 캐롤 콘월 매드슨 편집, In Their Own Words: Women and the Story of Nauvoo (솔트레이크시티: 데저렛 출판사, 1994년), 194~95쪽.

  12. 메리 스미스(1829~1832)와 하이럼 스미스(1834~1841)의 어렸을 때 사진이다.

  13. 톰슨, 회고록, 195쪽; 철자법을 현대화 시킴.

  14. 결혼에 대한 계시는 Deseret News 1852년 9월 14일자에 추가본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이 계시는 교리와 성약 1876년 판의 132편이 되었다.

  15. 교리와 성약 132:46.

  16. 교리와 성약 132:7. 기독교인들은 마태복음 22:23~30이 사후에 결혼이 끝난다는 것을 정당화 한다고 생각했다. 교리와 성약 132:15~17은 그 구절을 어떤 결혼은 끝이나고 어떤 결혼은 지속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재해석했다.

  17. 머시 필딩 톰슨, 간략한 일대기,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마침표 추가.

  18. 톰슨, 회고록, 195쪽 이 때 몇몇 다른 부부들도 영원을 위한 결혼을 했다. 브리검 영과 그의 아내 메리 앤 앤젤; 브리검 영과 그의 작고한 아내, 미리엄 웍스 (메리 앤 앤젤이 대리인 역할을 함); 윌라드 리차즈와 그의 아내 제니타 리차즈. 조셉 스미스 일지, 1843년 5월 29일, 조셉 스미스 모음집,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린던 더블유 쿡, Nauvoo Marriages, Proxy Sealings, 1843–1846 (프로보 유타; 그랜딘 출판사, 2004년), 5쪽

  19. 톰슨, 회고록, 195쪽; 철자법을 현대화 시킴.

  20. 톰슨, 간략한 일대기. 톰슨 부부는 로버트가 죽기 전부터 세입자를 받았다. 머시는 이 일을 계속했다.

  21. 머시 필딩 톰슨이 1883년 9월 5일에 조셉 스미스 삼세에게 보낸 편지, 조셉 에프 스미스 기록들,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22. 브라이언 시 헤일즈, Joseph Smith’s Polygamy, 3권. (솔트레이크시티: 그레그 코포드 출판사, 2013년), 2:64~65. 클레이튼은 후에 조셉 스미스가 하이럼 스미스의 제안대로 조셉의 아내 에머 스미스가 복수 결혼을 더이상 반대하지 않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 계시를 글로 남겼다고 말했다. 에머는 1843년 7월 12일 이 계시가 쓰여지기 전까지는 현세를 위한 복수 결혼은 받았들였으나 원리에는 반대했다. 윌리엄 클레이튼의 진술, 1874년 2월 16일, 앤드류 젠슨, “Plural Marriage,” Historical Record, 1887년 5월, 225~26쪽.

  23. 대널 더블유 바크먼, “New Light on an Old Hypothesis: The Ohio Origins of the Revelation on Eternal Marriage,” Journal of Mormon History, 5권 (1978년), 19~32쪽.

  24. 교리와 성약 132:1, 37.

  25. 어거스틴, “The Excellence of Marriage” [대략 401년경], 레이 커니 번역,The Works of Saint Augustine: Marriage and Virginity, 존 이 로텔 편집, 9권 (하이드파크, 뉴욕: 뉴시티 신문사, 1999년), 49쪽, 51쪽.

  26. 마틴 루터, “Genesis: Chapter Sixteen,” Luther’s Works, 54권, 3:45~46 (이 권은 자로슬라브 펠리칸이 편집하고, 조지 쉬크가 번역함)(세인트루이스, 미주리; 콘코디아 출판사, 1961년)

  27. 마틴 루터, “The Estate of Marriage” [1522], Luther’s Works, 45:24 (이 권은 왈더 아이 브랜트가 편집합고 번역함)(필라델피아: 머렌버그 신문사, 1962년) 루터는 영국 왕 헨리 8세에게 아라곤의 캐더린과 이혼하기 전에 복수 결혼을 하라고 제안했다. 루터가 로버트 반스에게, 1531년 9월 3일, Luther’s Works, 54권, 50:33 (이 권은 가트프리드 지 크로델이 편집하고 번역함)(필라델피아: 포트리스 신문사, 1975년)

  28. 존 위트 이세와 로버트 엘 킹던, Sex, Marriage, and Family in John Calvin’s Geneva: Volume 1: Courtship, Engagement, and Marriage (그랜드 래피즈, 미시건: 윌러엄 비 어드먼스, 2005년), 223쪽; 존 엘 톰슨, “The Immoralities of the Patriarchs in the History of Exegesis: A Reappraisal of Calvin’s Positio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6권 (1991), 9~46쪽.

  29. 캘빈의 반대는 물론 가톨릭 교회 일부의 훨씬 오래된 반대를 반영했다. 그들은 빠르게는 4세기부터 중세 후기까지 복수 결혼을 금지했으며 금지령을 성문법화시켰다. (존 위트, rom Sacrament to Contract: Marriage, Religion, and Law in the Western Tradition [루이스빌, 켄터기: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신문사, 2012년], 61, 99~100쪽) 많은 미국인들은 고대의 관행을 당시 상황에서는 적절했으나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상대주의와 진보주의 관점에서 보았다. 계몽주의 이성론과 반 일부다처제의 연관성에 관하여, 낸시 에프 코트, Public Vows: A History of Marriage and the Nation (캠브리지, 메사추세츠: 하버드 대학교 신문사, 2000년), 18~23.쪽 참조

  30. 교리와 성약 132:30, 37. 이 주제에 관해 더 알고 싶으면, [벨린다 마든 프랫], Defense of Polygamy, by a Lady of Utah, in a Letter to Her Sister in New Hampshire (1854년), 7~8쪽 참조.

  31. 교리와 성약 132:32.

  32. 브라이언 시 헤일즈, “Encouraging Joseph Smith to Practice Plural Marriage: The Accounts of the Angel with a Drawn Sword,” Mormon Historical Studies 11권, 2호 (2010년 추계): 55~71쪽.

  33. 성도들이 솔트레이크밸리로 들어왔을 즈음에, 적어도 196명의 남성과 521명의 여성이 고대의 복수 결혼을 시작한 상태였다. 헤일즈, Joseph Smith’s Polygamy, 1:32, 2:165

  34. 톰슨, 간략한 일대기.

  35. 쿡, Nauvoo Marriages, Proxy Sealings, 3쪽. 하이럼 스미스가 복수 결혼을 받아들인 시기는 1842년 또는 1843년이었다. 브리검 영 설교, 1866년 10월 8일, 역사가 사무실이 설교를 보고하다,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앤드류 에프 이햇, A Holy Order: Joseph Smith, the Temple, and the 1844 Mormon Succession Question (저자가 출판함, 1990년), 28~32쪽; 루스 보즈 세이어즈, 진술서, 1869년 5월 1일, 조셉 에프 스미스 진술 서적, 5:9,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36. 머시 톰슨, 증인 진술, 미주리의 그리스도 교회 대 복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70 F. 179 (약 1895년 8회 경), 1902년 미국 증인 진술, 타자됨, 247,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37. 신명기 25:5~10

  38. 톰슨이 스미스에게, 1883년 9월 5일

  39. 톰슨, 증인 진술, 239쪽

  40. 톰슨이 스미스에게, 1883년 9월 5일; 또한 톰슨, 증인 진술, 263쪽 참조

  41. 영적 은사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간증을 “믿는” 것이다. 교리와 성약 46:14.

  42. 톰슨, 간략한 일대기. 이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보려면, 머시 필딩 톰슨, “Recollections of the Prophet Joseph Smith,” Juvenile Instructor, 1892냔 7월 1일자, 398~400쪽 참조.

  43. 톰슨, 증인 진술, 238쪽

  44. 예를 들면, lds.org/topics에서 복음 주제, “커틀랜드와 나부에서의 복수결혼” 참조.

  45. 예를 들어, 사적인 대화에서, 조셉 스미스는 여성들에게 복수 결혼을 제안하면서 권위에만 의존하지 않고 일인칭으로 (”저는 명을 받았습니다”) 말한 다음 가르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설득했다. 예를 들면, 루시 워커 킴볼 스미스, “A Brief Biographical Sketch of the Life and Labors of Lucy Walker Kimball Smith,”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에밀리 다우 패트리지 영, 일기와 회고록, 교회 역사 도서관, 솔트레이크시티, 참조. 조셉 스미스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부정적인 후탈을 남기지 않고 교회에 남아있은 여성들의 예를 보려면, 헤일즈, Joseph Smith’s Polygamy, 1:274~75; 2:31, 120쪽; 패트리시아 에이치 스토커, “‘The Lord Has Been My Guide’: Cordelia Calista Morley Cox (1823–1915),” 리처드 이 털리와 브리태니 에이 채프맨 편집, Women of Faith in the Latter Days: 1권, 1821~1820년 (솔트레이크시티: 데저렛 출판사, 2012년), 53~24쪽 참조.

  46. 톰슨, 증인 진술, 250~51쪽 여성에게 복수 결혼의 사제적 호소력에 관해서는, 캐스린 플레이크, “The Emotional and Priestly Logic of Plural Marriage” (2009), The Arrington Lecture, 15호 참조.

  47. 톰슨, 간략한 일대기.

  48. “Notice,” Times and Seasons,1845년 3월 15일, 847쪽. 이 숫자는 아마도 1845년 12월에 나부 성전이 헌납되었을 때 더 많아졌을 것이다.

  49. 톰슨, 간략한 일대기.

  50. 교리와 성약 132:19.